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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위의 유럽]미샤 마이스키/고전주의 음악/낭만주의 음악/ 브로츠와프/ 폴란드

음반위의 유럽

by 써니윤 2016. 10. 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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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위의 유럽]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Struna Czasu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연주

in NFM 브로츠와프, 폴란드


글, 사진 by 써니

 

브로츠와프 국립음악홀 NFM: 흡사 서울의 강남 교보 문고 처럼 생겼다.  

2016년 9월 29일, 기대하던 미샤 마이스키와 4중주단의 공연. 아무리 음악을 좋아해도 모든 음악에 감동하거나 감탄할 수는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연주는 꽤나 실망스러웠다. 음악, 그리고 이를 전달해 주는 연주자를 그저 ‘알고 있는 것’ 으로는 감히 그 연주회장에서의 느낌을 예측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이런 예측 불가한 ‘현장성’ 은 각종 미디어가 발달하여 웬만한 연주는 유투브나 생중계로 볼 수 있는 요즘에도 사람들이 아직도 아날로그 식으로 연주회장을 찾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국립음악홀 NFM 내 메인 홀: 적어도 내 귀에는 예술의 전당보다 음향이 훌륭하다  


1부: 고전 음악 vs 낭만 음악 


비교는 각자의 특징은 더 잘 드러내 보여준다. 쉬마노프스키 4중주단Szymanowski Quartet이 연주한 하이든의 곡과 프랑크의 곡을 통해 고전 시대와 낭만시대를 대조 할 수 있었다. 하이든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음악의 특징이 조화, 균형, 질서라면 프랑크가 속한 낭만주의는 말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 자체였다.

 


 

역시 낭만 시대 음악의 화룡점정은 피아노 였다. 피아노 없이 연주되었던 하이든의 곡과 비교하니 피아노 라는 악기 소리의 존재감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당시 다른 건반악기였던 챔발로와 달리 음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한 ‘포르테 피아노’ 의 줄임말로 ‘피아노’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답게, 피아노는 감정의 기복을 보다 자유로이 표현하는 낭만시대 음악과 찰떡 궁합이었다. 피아노는 현악기와 달리 보다 날렵하고 가볍게 움직일 수도, 여러 음을 짚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은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는 낭만주의 음악에 최적화된 음향적 효과를 제공한다.

 

 피아노 없이 현악기로만 진행된 하이든의 곡과는 달리 프랑크곡에서 등장한 피아노는 연주 전체를 비추는 따뜻한 햇살이 되기도, 자욱한 안개가 되기도 하며 풍부함을 선사했다. 미샤 마이스키의 딸인 릴리 마이스키의 피아노 연주는 그다지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낭만주의 음악에서의 피아노 라는 악기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연주였음에는 분명했다.

 


2부: 미샤 마이스키,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미샤 마이스키 라는 이름을 보고 망설임 없이 표를 샀지만, 이번 연주는 미샤 마이스키를 주인공으로 한 연주라고 하기는 무리가 따르는 연주가 아니었나 싶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미샤 마이스키는 자신의 유명세로 피아니스트인 딸을 밀어주러 나온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연주보다 오히려 쉬마노스키 4중주단Szymanoski Quartet 에 속한 첼리스트 마친 시에니아프스키Marcin Sieniawski 의 소리가 훨씬 더 내 눈과 귀를 끌어당겼다. 특히 연주 자체를 즐기는 첼리스트는 듣는 이도 덩달아 흥이 돋게 했는데, 이에 비해 이들 4중주단에 살짝 동떨어진 것 같은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내 눈은 아무래도 다른 연주자들 보다는 미샤 마이스키에게 더욱 쏠릴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의 첼로 소리가 내 귀에 닿지 않아 연주 내내 참 답답했다. 3곡 중 그가 출연한 곡이 단 한곡 밖에 되지 않아 연주 분량이 적었음은 물론이고 그 나마 그 한 곡도 소리 자체가 턱없이 작았다. 4중주 연주자의 소리가 결코 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를 느껴 보기에 그의 첼로 음향은 심하게 작았다. 

 


 

 

그의 음악적인 존재감은 미샤 마이스키라는 명성과 시각적인 존재감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물론 소리의 질에서는 그가 대가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들릴 듯 말 듯 뭍혀 버리는 그의 소리는 내가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를 들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연주를 보면 볼 수록 피아니스트인 딸 릴리 마이스키를 밀어주려고 억지로 끼워 맞춘 연주가 아닐까 라는 추측에 더욱 확신을 하게 되었다. 너무 적은 분량의 연주와 심하게 작은 음량의 이유를 1948년 생인 그의 나이 탓으로 돌리며 이해해 보려고 애써 봤지만, 이 연주는 과연 무엇을 전달하려 한 연주였을까는 의문으로 남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망친 연주까지는 아니었지만, 딱히 뚜렷한 주제도 뛰어난 곡의 해석이나 눈에 띄게 끼가 넘치는 연주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늘 연주는 대가 미샤 마이스키를 그냥 가까이서 연주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봤다는데 의미가 있었을 뿐, 연주 자체로 내 귀가 즐겁거나 마음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역시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이름난 연주자라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극도로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모처럼 연주에 오신 관객분 들이 이 연주로 클래식 음악회는 역시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는 선입견이 심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나의 모든 박수는 4중주단 단원,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제 2바이올린 주자인 그제고시Grzergorz Kotow와 첼로 연주자 마친 시에니아프스키Marcin Sieniawski에게 돌리려고 한다. 미샤 마이스키와 릴리 마이스키에게 줄 박수는 아무래도 다음에 그들의 기량을 온전히 표현할 다음 기회를 기약해 본다.



(만 7세 남아는 결국 슈베르트 3악장 도중에 잠이 들어버려서 첫 번째 커튼 콜을 마치자마자 나와야만 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나 조성진의 연주에서는 더 긴 시간도 끄떡없이 버텼는데, 아이들도 듣는 귀는 똑 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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