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그리고 삶]쉼을 배우다: 드뷔시의 달빛/피아니스트 조성진/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 폴란드 생활/

유럽, 음악 그리고 삶

쉼을 배우다

드뷔시의 달빛

베르가마스크 조곡 중

 

글, 사진 by 써니

 

△ 폴란드 브로츠와프 내 오스트로 툼스키 전경: 동유럽의 베니스라 불릴 만큼 섬이 많은 지역이 이 곳 브로츠와프이다. 가장 큰 섬인 오스트로 툼스키:성당섬 과 성 요한 성당.

폴란드의 겨울이 온다. 무엇보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의 차가움이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다. 한낮의 태양은 아직 따가워도 공기만은 더 이상 여름의 것이 아니다.

이런 과도기적 날씨가 나에게 건강상의 고비여서 일까? 폴란드의 가을 공기는 아무리 날씨가 좋은 요즘이라도 차갑고 냉정하기까지 느껴진다. 9월의 폴란드는 긴 겨울을 맞는 전야제 같은 긴장과 여름을 보내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오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와 알프스: 유럽형 배산 임수의 좋은 예(?)일까? 4월인데도 눈에 덮인 알프스가 블레드 호수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난 휴식과 쉼을 ‘시간 낭비’ 로 일축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몸이 파업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도 딱 이 사태가 벌어졌다. 주말 내내 하루 종일 졸거나 무기력하더니만 오늘은 결국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나서는 며칠 못 잔 사람마냥 내내 졸음에 취해 있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아직 이리 본인 컨디션 관리 하나 못하다니, 자신을 돌보며 긴장과 쉼을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은 내가 아직 배워 나가야 할 부분임을 새삼 느꼈다.

난 쉼이 생각 날 때 마다 듣는 곡이 있는데, 바로 드뷔시의 ‘달빛’ 이다. 베르가마스크 조곡Bergamasque Suite에 속한 4곡 중 하나인 달빛clair de lune 은 인상주의 음악에 중독되게 만든 장본인 격의 곡이다. 인상주의 음악은 어깨에 가득 올라와 있는 긴장과 짐을 자연스레 내려놓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는 아마도 균형미와 조직미로 무장한 고전주의 음악의 무결점의 질서에서 벗어나 오로지 감정과 느낌의 흐름에 집중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 까 싶다. 모네의 그림처럼 어떠한 분석 없이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는 자유로운 감정의 허용이 드뷔시의 음악에서도 느껴진다. 바라보면 이유 없이 기분이 끌어올려지는 환희를 맛보게 되는 매력은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에서와 동시대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한 공통분모이다. 드뷔시의 음악을 들으면 정신없이 지나간 저녁에 드라마를 보며 종일 혹사한 이성을 내려두고 감성을 끌어올리며 휴식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기분이랄까?

 

△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 호수 중앙의 섬으로 가는 배에서 찍은 풍경. 동화속 모습이라는 표현이 딱 이 곳을 위함일 것이다.

8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과 그의 유럽 축제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앵콜곡으로 바로 이 곡을 들려주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으로 시베리아의 광활한 벌판을 달려온 직 후에 들려준 드뷔시의 달빛은 어느 때 보다 달콤하고 평안한 휴식의 감성을 안겨주었다. 마치 가쁜 호흡을 내쉬고 있는 나에게 ‘괜찮아, 잠시 쉬어도 돼.’ 라고 다가와 위로해주는 20년 지기 친구 같았다.

같은 달을 모티브로 한 곡이라도 어쩜 그리 느낌이 다른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사색하는 독일 철학자와의 만남이라면 드뷔시의 달빛은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에 홀연히 비친 달빛의 흔들림을 말없이 바라보며 함께 하는 친구와의 조우 같다. 어떤 답도 어떠한 이유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저 달빛이 비치는 대로 감정의 흐름을 맡겨도 되는 그런 순간을 선사하는 곡이 바로 드뷔시의 달빛이다.

물의 흐름처럼 자유로이 흐르다 옥타브로 멜로디가 연주되는 대목에서는 내 기분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친구에게서 위로를 받는 듯한 착각 마져 든다. ‘괜찮아,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라고 말이다. 

오늘도 쉼을 배우며, 휴식을 나에게 선물하며 드뷔시의 달빛 그리고 바르샤바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에 얽힌 추억을 떠올려 본다.

 

* 드뷔시의 달빛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CvFH_6DNR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