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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한국인을 생각하다]추석에 대한 단상/문화 차이/ 추석/ 서양의 파티

유럽살이 유럽여행

by 써니윤 2016. 9. 18.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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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한국인을 생각하다]


추석에 대한 단상

: 서양 vs 한국 문화 비교


글, 사진 by 써니

 


“그럼 결혼을 왜 했어?”


"나 요리 싫어하는데" 라는 말에 대한 친구의 첫 반응이었다. 그 당시에는 웃고 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말이 머릿 속에서 계속 맴맴 돌았다. ‘그렇지, 난 요리를 안 좋아하는데 결혼을 왜 했을까?’에서 시작된 물음은 ‘과연 남자에게도 이 질문을 했을까?’ 라는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왜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요리하는 역할을 떠안아야 하는 것일까? 음식 하는 것에 취미가 그리 없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요리는 ‘떠안아야 하는’ 짐이고 그저 삶을 이어가지 위한 노동일뿐인지라 왜 이걸 꼭 여자가 해야 하는지 억울한 생각 마져 들기 시작했다.


요즘 추석에 얽힌 애환을 토로하는 기사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한결 같이 여자는 가사노동 때문에, 남자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몸과 마음이 지쳤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이에 대한 댓글로 제발 반반 나눠하자는 말부터 명절이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는 반응까지 한국인이라면 예외 없이 명절에 대한 각자의 감정이 얽혀있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추석을 떠올리면 이랬다. 추석이면 아버지의 7남매 식구과 할아버지의 2분의 형제이신 큰할아버지 분들을 비롯한 이하 모든 식구들이 한 집에 모이곤 했다. 사촌들까지 족히 40명은 훨씬 넘었을 것이라고 기억이 된다.

신기한 것은 남자분과 여자분들의 행동이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다. 20명 남짓한 여자 어른들은 하루 종일 얼마나 바쁘신지 부엌 밖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반면 남자 어른들은 예외 없이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계시거나 담배를 입어 물고 계시는 등  무료해 보일 정도로 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계셨다. 마치 남녀가 편을 나누어 각자의 미션을 수행하듯 여자분들은 대화조차 할 시간조차 없이 바빠 보였고, 반면 남자분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인 마냥 태연하게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더 신기한 일은 차례와 식사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여자 분들이 바삐 차려놓은 차롓상에 남자분들은 주인공이냐 된 마냥 절을 하는 반면, 여자 분들은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는 감히 낄 수 없다는 듯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식사를 할 때도 방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상에 갖가지음식을 편안히 앉아서 드시는 남자분들에 비해 여자 어른분들은 그 상을 모두 차리고 나서야 한 쪽 구석에서 겨우 잠시 앉아서 대충 끼니를 해결하셨다. 산더미처럼 나올 설거지 거리를 해결하러 다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그릇, 밥그릇, 컵, 수저에 개의 그릇에 수많은 반찬 그릇들이 치워질 동안 어느 한 명의 남자 어른도 일어나 옮기는 이는 없었고, 부엌에 다 쌓아 놓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그릇들을 씻어내는 과정에서도 음식을 했던 그 분들이 다시 그렇게 노동을 시작했다. 당시 초등 학생이었던 내 눈에 추석 가족 모임은 음식을 위한, 음식에 의한, 음식이 주인공이 되어 거기에 모든 구성원, 아니 모든 여자들이 희생하고 매달려야 하는 아주 특이한 행사로 보였다.


이 곳 폴란드에서 경험한 ‘모임’ 은 이와는 달랐다. 미국인이 주축이 된 이 모임과 한국인이 모인 자리의 큰 차이 중에 하나는 바로 음식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가 음식 때문에 홀로 희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먹고 싶은 것, 나누고 싶은 음식을 가져와서 함께 할 뿐 꼭 대단한 요리를 대령할 필요도 없었다. 각자의 형편과 상황이 되는 대로 나눴다. 누구는 정성껏 양념된 뜨끈한 치킨 요리를, 어떤 이는 포장된 하몽을 사와서 접시에 올려두었고, 누구는 과일을 가져와서 씻어 놓았다. 음식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며 하루 종일 전을 부치는 이도, 야채를 일일이 잘라서 볶아가며 엄청난 양의 잡채를 해대는 이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나누며 먹으며 또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다. 먹자고 만난 것이 아니라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의 모임에서 음식은 만남을 위한 보조 역할일 뿐, 모임의 중심은 대화 였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심지어 30명이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설거지를 해야 할 접시는 채 10개도 되지 않는데, 뷔페식으로 각자 음식을 접시에 덜어 먹는 식으로 진행되었기에 나눠 먹는 음식을 두는 식기를 제외한 나머지 개인 접시와 포크류, 컵은 모조리 일회용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음식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참여하여 준비했고, 모두가 누리며, 모두가 즐겼다.


추석에 우리가 힘든 이유는 사람보다 음식을 우선하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 보다 단지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 잡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꼭 누군가를 희생해서 먹어야만 할 정도로 한끼 식사의 무게가 그리 중한 것일까?


과거 우리나라가 농경 사회였을 당시에는 아마도 갓 수확한 곡식과 과일을 나누는 것 자체가 추석을 일 년 중 가장 기쁜 날로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일년  내내 농사일로 수고한 식구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감사를 표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이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른 명절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조상들은 감사와 나눔의 의미로 추석을 지냈을 것인데, 지금 우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사람이 먼저 이어야 한다.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마땅하지 먹기 위해 사람이 희생해야 하는 구조는 분명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남자, 여자의 성역할을 떠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나눠서 음식을 준비하고, 나눠서 먹고, 나눠서 정리하는 것은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할 의무가 아니라 나도 기꺼이 함께 하고 싶은 일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조금씩 나누면 모두가 행복할 일을 역할이나 전통을 운운하며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습관은 전통이 아닌 악습이다.


성경에 유명한 일화 중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 하는 순간에 예수님이 이를 막는 내용이 있다. 당시 그들의 ‘전통’과 ‘법’ 에 따르면 당연히 그 여인은 그렇게 죽어야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있는 사람이 이 여자를 치라.” 고 말씀하시며 기존에 옳다고 여겨진 법도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먼저임 이미 2천년 전에 세워진 패러다임이다.


문화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문화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면, 그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 받고 있다면, 그 것이 과연 지켜야 할 문화인지 고쳐야 할 악습인지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이다. 문화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우선이어야 한다. 음식이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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