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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위의 유럽] 음악가에게 숫자 9란? by 말러의 9번 교향곡

음반위의 유럽

by 써니윤 2017. 4. 2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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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9번 교향곡

 

음악가에서 숫자 9란?

 

2017.04.20. NFM in 브로츠와프, 폴란드

by 써니윤

 

 

 

 

9는 불길한 숫자이다. 특히 작곡가에게는 말이다. ‘9번 심포니를 쓰면 죽는다.’ 라는 징크스 의식했던 것일까 아니면 본인의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까. 베토벤, 드보르작 등의 대가 음악가들은 9번째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믿음을 피해보고자 그는 이 곡에 9번이라는 제목 대신 대지의 노래라는 곡명을 붙였지만, 말러는 9번 교향곡의 초연을 미쳐 듣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말러 9번 교향곡은 작곡자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떠올리며 지은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곡을 듣기 전엔 심하게 우울해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한 음식도 직접 내가 먹어보지 않고서는 그 맛과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이 음악도 직접 내 귀로 듣고 느껴야 제 맛을 아는 법인가보다 

 

△ 윌리엄 터너의 작품: 런던 내셔널 갤러리  

 

유명한 곡 맞아?

베토벤 운명 등과 같이 우리에게 알려진 곡은 보통 1악장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멜로디가 등장하여, ‘~ 이곡하는 느낌이 온다. 하지만 말러의 교향곡은 꽤나 입에 오르내리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한 선율은커녕 멜로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만큼 모호한 소리들이 이어진다.

마치 아직 붓을 대지 않은 캔버스에 이미 깔린 바탕색과 같다고나 할까. 곡 전반에 걸쳐 배경소리와 같이 깔리는 현악기 소리는 말러의 곡이 여타 다른 작곡가의 것과 다른 존재감이 있음 말해주고 있었다. 흡사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를 항해하는 이는 말러이고, 현악기가 주는 배경 소리는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안개 같았다. 현악기 소리로 빙의한 안개는 짙어서 도저히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앞이 훤히 보여서 육지를 향해 힘차게 항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말러 자신의 자서전

 

이곡이 작곡될 1909-1910 당시 막 50대를 접어든 말러는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불안한 자신의 생에 대한 불안함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결국 말러는 191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으로 봐서는 말러 자신도 자신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스스로 예감했던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흔히 말러의 곡을 염세적이라고들 하지만 곡을 직접 들어보니 나에게는 그리 비관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음악이 추상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다가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이게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처럼, 모차르트나 전 시대의 뚜렷한 멜로디 위주로 흘러가는 음악에 비해 말러의 음악은 분명 물음표가 생기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도 역시 머리가 지끈지끈한 상태에서 듣는 80분은 우와하는 감탄을 내 뱉을 만큼 좋지도 그렇다고 딱히 싫지도 않은 뭔가 말로 표현하기 모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말러의 음악의 힘은 음악을 다 듣고 난 후의 잔상에 있었다. 공연 후에는 사색을 부르는 아우라가 꽤나 진하게 남았다.

베토벤처럼 내리 꽂는 강렬함,

쇼팽처럼 눈물나게 하는 애절함,

혹은 모차르트같은 청아함은

아니지만,

말러 교향곡 9번에는 철학책을 읽고 난 것 같이 생각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고전시대나 낭만시대의 여타 음악과는 달리 말러는 현재 내가 서 있는 현실을 담아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쇼팽과 같은 전시대 낭만주의 음악과 달리 후기 낭만주의인 말러의 음악은 내가 지금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던 것 같다. 결코 과하게 극적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응집되어 표현되어있다.  

 

보통의 경우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나 협주곡에는 그 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멜로디를 담고 있는 주인공 격인 악장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말러의 9번 교향곡은 모든 악장이 동등하게 들렸다. 각 악장이 고유의 색깔이 있어서, 마치 한 사람의 생이 시작되고 유년기, 청년기를 기자 장년기, 노년기를 맞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말러는 9번 교향곡 징크스와 자신의 좋지 않은 건강상태를 의식하여 삶 전체를 돌아보고 정리하고자 이 곡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말러의 자서전과 같은 이곡을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는 필시 말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연륜을 갖춘 이어야 하지 않을까.

 

 

 △ 윌리엄 터너의 작품: 런던 내셔널 갤러리

말러를 담을 수 있는 연주자란

 

철학을 제대로 깊이있게 가르치려면 인생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듯, 말러의 음악도 그러하지 싶다.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지휘자라 할지라도 말러의 음악을 담으려면 실력과 더불어 연륜이 보태져야만 가능하지 싶다.

굳이 이 곡의 클라이막스를 꼽는다면 정점은 1악장이 아닌 마지막 4악장에 등장한다. 인생 전체의 경험을 통해 결국 깨달음을 얻은 거장과 같이 말이다. 말러의 9번 교향곡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의 일련의 시련과 행복 그리고 교훈을 한곡의 음악으로 녹여내 담은 곡이 아닐까 싶다. 이 곡을 해석하고 연주로 실현해야 할 지휘자는 음악적 실력 뿐 아니라 연륜까지 갖춘 이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휘자는 그만큼 작곡자의 감정과 생각을 공감해야 할 수 있는 재능과 마음판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흐무라 선생님의 지휘는 이번 말러의 연주에서 빛을 발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등장하여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던 지휘자 흐무라 선생님은 지휘를 시작하면서 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춤을 추기도 오죽하면 옆에 있던 아들래미가 지휘자 선생님이 춤을 춰라고 말했을까.

특히 말러는 오케스트라 연주자 뿐 아니라 지휘자의 역량을 필요로 하지 싶다. 성악가가 노래로 불렀으면 숨이 넘어갔을 것 같은 무지막지하게 긴 프레이즈나 서로 다른 악기로 이어서 진행되는 멜로디를 하나의 라인으로 그려내는 일은 오로지 지휘자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노장의 혼과 힘을 다한 지휘에 관객은 기립박수로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무슨 프로그램이 이렇게 짧아?

쉬는 시간도 없이 달랑 말러의 9번 교향곡만으로 80분만에 끝나는 프로그램을 보고, 소품이라도 몇 개 더 넣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9번 교향곡 하나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필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 사람이 태어나 인생의 고락을 지낸 후 눈을 감는 순간 까지의 여정을 담은 것처럼 느껴졌던 이 곡의 마무리는 역시 눈을 감는 순간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곡은 결코 화려하거나 시끄럽게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영면속으로 사라지듯 그렇게 숭고하게 끝을 맺는다. 한 사람이 눈을 감은 이후의 공간을 어떠한 소리로 채울 수 있을 것인가. 음악회는 말러 9번만으로 시작해서 9번 교향곡으로 끝을 맺어야 마땅할 것임을 음악을 들은 이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만났던 생애 첫 말러 교향곡 라이브 공연. 말러에 빙의하여 곡을 표현 해 준 흐무라 선생님 덕에 또 다시 다른 말러 교향곡도 찾아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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