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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여행] 쇼팽과 그의 유럽 축제 2편/쇼팽의 심장/ 성십자가 성당/ 유리니치/ 쉬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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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윤 2016. 9. 2.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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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생활]


쇼팽과 그의 유럽 축제 후기 2편:

쇼팽의 심장과 음악을 느끼다

드미트리 쉬슈킨Dmitry Shishkin과 알료샤 유리니치Alyosha Jurinich



글, 사진 by 써니



쇼팽의 거리에서 


신세계 거리Nowy Swiat 에 일찌감치 간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10시에 공연이 있는 성십자가 성당이 위치한 신세계 거리에 어둠이 깔리자 내 마음은 말랑말랑 해지기 시작했다. 연주회에서 앞자리에 앉을 단순한 목적으로 일찍 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조명이 비치는 신세계 밤거리는 본 요리를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돕는 맛깔 나는 에피타이져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짙푸른 색깔의 하늘과 듬성듬성 자리한 동유럽 도시의 조명을 바라보며, 쇼팽이 걷던 이 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해며 이미 나는 쇼팽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 십자가 성당 앞에 닿았다. 성당은 원래 성인saint 이나 교황 정도는 되어야 묻힐 수 있는 곳인데, 바르샤바 시내의 한 복판에 위치한 성당에 쇼팽의 심장이 있다는 사실은 폴란드에서의 쇼팽의 입지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는다. 아버지는 프랑스인 이었고, 평생의 반 이상을 타국에서 살았지만 그의 가슴과 영혼은 늘 조국 폴란드와 함께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름답지만 슬픔과 애잔함이 묻어나는 쇼팽의 음악에는 폴란드의 역사와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인들 앞에서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연주해서 영광이었다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인터뷰 내용을 알 수 있듯이 쇼팽의 음악은 폴란드인들에게 국가의 정체성과 민족성의 상징이다. 



그의 심장, 그의 음악 


성당을 들어서자 쇼팽 시대의 피아노인 에라드Erard와 조율사 분의 모습부터 눈에 들어왔다. 예배장소인 만큼 자연스레 발소리와 목소리를 낮춰졌다. 늘 쇼팽의 마음이 향하고 있었던 폴란드, 그의 심장이 함께 하는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에서 쇼팽 축제가 열리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아이디어에 감탄을 하게 된다. 쇼팽의 심장, 그리고 그의 음악을 감성이 최고조에 달할 시간 10시에 듣는 공연을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폴란드인의 예술성과 섬세한 감수성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연주자인 알료샤 유리니치Alyosha Jurinic가 마주르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에라드Erard 피아노는 음 사이의 간극이 길게 느껴질 정도로 소리가 살짝 끊어지는 반면, 성당의 높은 천장과 대리석으로 울림이 매우 길어서 빠른 음을 연주할 때는 마치 오른 쪽 페달을 밟고 있는 것처럼 소리가 서로 엉겨 붙을 수 밖에 없었다. 피아노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살짝 끊어지는 찰나를 지나 성당의 높은 공간을 휘감으며 증폭되며 긴 소리 그림자를 남겼다. 그래서 그런지 감상적인 녹턴에서는 더 할 수 없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고, 앵콜곡인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조곡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소리와 울림, 그리고 분위기에 푹 빠져있었다.




만만찮은 피아노, 그리고 유리니치 


피아노를 누르는 유리니치의 손가락의 움직임과 그의 자세를 보며 에라드 피아노가 지금의 피아노와 다른 점이 느껴졌다. 바이올린 같은 다른 악기와 달리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피아노 주자는 연주회장 마다 각기 다른 피아노 상태나 소리에 적응해야 하는 고충이 있다. 과거에 실기 시험이나 콩쿨에서 나보다 앞에서 연주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묻는 가장 첫 번째 질문이 바로 '피아노 어때?’ 였다. 건반이 무거운지 소리가 얼마나 울리는지 등의 피아노 상태는 무대에서 그 동안 연습한 기량을 최대한 표현해 내야 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아주 결정적인 요소이다. 연주 경험이 많은 전문 피아니스트들은 워낙 훈련이 되어서 학생 보다는 악기에 따른 연주 기복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이번 에라드 피아노는 프로 피아니스트에게도 영향을 줄 만큼 분명히 일반 피아노와는 많이 달라보였다. 


에라드 피아노는 건반의 깊이가 확실히 얕아보였다. 운동할 때 밑창이 얇은 신발을 신고 뛰면 다리와 무릎에 무리가 가듯, 에라드 피아노 위에서도 손가락이 긴 시간 동안 달리면 피아니스트의 손이 쉽게 피로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들었다. 게다가 건반 전체의 길이도 짧아서 손의 모양도 평소와 달라야 했으며, 피아노의 높이도 낮아서 연주자가 허리를 구부릴 수밖에 없는 악조건 이었다. 하지만 유리니치의 어떤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자기 길을 진득하게 가는 뚝심 있는 연주자임을 느껴졌다. 그는 프로다웠다. 심한 울림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법도 한데 쇼팽의 마주르카, 발라드 f m, 녹턴 op.27, no.2 그리고 소나타 b m를 차분하게 연주해 나갔다. 곡과 곡 사이에도 음악에 더욱 집중하려는지 일어나 인사를 하는 대신 무언가를 생각하는 자세를 취했고, 이런 연주자의 마음을 관객도 읽었는지 우리는 박수를 치는 대신 조용히 다음 연주를 기다리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감탄과 감동의 차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연주는 무엇일까? 유리니치의 연주에 앞서 같은 날 5시에 드미트리 쉬슈킨의 연주를 만났는데, 쉬슈킨은 흠잡을 데 없는 연주를 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리니치의 연주에 왠지 모르게 더 마음이 갔다. 쉬슈킨은 완벽한 테크닉으로 모든 곡을 아주 쉬운 곡을 치듯 힘 하나들이지 않고 연주해냈고, 소리의 질 또한 고급 실크 스카프 같이 매끄럽고 빛이 났다. 쉬슈킨의 세련되고 말끔한 연주에 매료된 관객들은 환호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쉬슈킨과 달리 유리니치의 연주는 성실함이 마음에 와 닿았다. 19세기 초 쇼팽시대의 피아노인 에라드 위에서 움직이는 그의 손과 태도에서는 정성이 묻어났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가는 음악에는 내 마음을 만지는 따뜻함과 공감이 느껴졌다. 화려한 기교의 당찬 쉬슈킨이 정장을 말끔히 갖춰 입은 비즈니스 파트너라면, 겸손하면서 부드러운 유리니치의 소리는 나즈막이 말을 거는 오래된 친구 같다고나 할까.  연주에 담긴 정성이 그 자리에 함께한 관객들에게 전달 되었는지, 약 한 시간 동안의 그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목소리로 내는 환호 대신 말없는 기립박수와 눈빛으로 감사를 표했다. 여기에 유리니치는 미소와 거듭된 인사로 보답했다.


뛰어난 것에 감탄한다. 하지만 감탄이 항상 감동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쉬슈킨의 리사이틀은 분명히 감탄하고도 남을 존경과 환호를 받을 만한 정상급의 연주 였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준 연주는 단연 유리니치 였다. 유리니치의 연주를 다른 공연장에서 다시 들어보고 싶을 만큼 그 날의 잔잔한 감동은 그리움으로 이어졌다. 




일리 있고 논리 정연한 말보다 사랑을 담은 한마디 공감의 말이 마음이 움직여지는 법이다. 내가 들은 유리니치의 연주는 정성과 성실함 그리고 마음을 만지는 따뜻함이 있었고, 그 것이 내 마음을 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묻힌 쇼팽의 심장과 함께한 유리니치의 연주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며, 또 하나의 음악,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