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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진짜 이유: 폴란드에서 한국 교육을 생각하다

유럽살이 유럽여행

by 써니윤 2016. 11. 14.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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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진짜 이유

글, 사진 by 써니



' 우와, 악보도 없이 즉흥연주를 하네. 음악을 오랫동안 공부해온 전문가임에 틀림이 없어.'

연주를 듣고 꼭 말을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발음도 어려운 Gerson (게르슨이라 읽는게 아니란다 ㄱ 와 ㅎ 의 중간 발음이었다) 은 스페인 출신으로 음악을 듣다보면 그 느낌에 충실해서 연주를 한다고 했다.

'역시 음악과 이론을 깊이 공부했나봐. 느낌에 의존해서 만들어내는 오블리가토 멜로디가 어떻게 저렇게 기존 음악에 착착 붙을 수가 있지?'

여기가 다가 아니었다. 그는 트롬본도 연주한다고 했다. 관악기 중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악기인데 말이다.

'트롬본은 부전공인가봐'

난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당연히 음악을 전공한 사람으로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그는 음악의 근처와도 거리가 멀어보이는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세상에 음대생보다 나은 공대생이었다.'

사실 이 곳 폴란드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놀라운 것은 음악을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이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그 것도 평범해 보이는 '일반인'들이 말이다. 연주회장과 오페라 공연장에 관객들이 늘 꽉 들어차 있는 것도 '일반인' 들의 수준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들의 교육을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중학교,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모든 예체능 활동을 접고 국영수학원을 뺑뺑이 도는 우리나라 교육과 달리 이 곳 유럽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악기를 시작해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성인이 될 때 까지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뭐 하나 악기를 배우면 도대체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 곳 음악 교육 때문에 속이 터진다는 한국 학부모가 많은데 이들이 굳이 빠르게 배우지 않는 이유는 길게 지속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의 다양함을 제대로 접하고 그 것을 숙성시켜 나가려면 어릴 때는 물론 적어도 십대 동안은 지속적으로 듣고 연주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어릴 때 속성으로 배운 체르니 100번이나 귀에 익은 몇곡을 쉽게 편곡해 놓은 명곡집 정도로 음악적 취향이 길러지기 바라는 것은 콩을 심어놓고 하루아침에 아름드리 나무가 되길 바라는 것과 같다.

본격적으로 '공부' 해야할 나이 이 전에 모든 걸 마쳐야 한다는 강박에 음악 보다는 '진도' 에 촛점을 맞출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이해는 간다. 하지만 '공부' 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인생을 풍요롭게 느끼고 생각하고 또 나누는 것이 삶이 아니란 말인가? 또한 그렇게 공부에 매진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공부'의 중심에 서 있는 영어만 두고 봐도 그렇다.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게 엄청난 시간과 비용, 노력을 들여 영어 공부를 한 결과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어공부의 목적이 수능 고득점이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수능 영어는 영어를 듣고 말하는데 최적화된 시험이 아님은 분명하다. 리스닝의 비중과 난이도는 매우 낮거니와 스피킹은 아예 시험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수능영어는 말하는 영어를 위한 효과적인 과정이 될 수 없다. 수능이라는 제도를 거친 우리나라 평범한 국민이 영어를 말하기 위해서 성인이 되어서 또 다른 교육을 찾아 헤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십대가 모든 걸 포기하고 매진하는 그 영어는 수능이라는 시험의 스킬을 배우기 위함일 뿐이고 안타깝게도 수능 영어를 배우는 과정으로는 영어로 자유로이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 곳의 십대 아이들은 음악을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배워가는 과정에서 음악적 소양을 익히고 나아가 훗날 자신이 무엇을 하든 이 것을 자신과 남을 위해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스페인 출신의 Greson 처럼 말이다. 배우고 익히는 진득한 과정과 이를 나와 남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데 쓰는 일종의 순환 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진도에 집착하여 경쟁에 치여서 배우는 과정이 즐거울 수가 있겠으며, 왜 배워서 도대체 어디에 써먹게 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교육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 수 있겠는가. 왜 그 어느 누구도 왜 수십만의 대한민국 십대들이 시간을 부어가며 준비하는 수능영어에 말하기가 없는지 묻지 않는가. 왜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매진한 '수능 준비'시간이 단순한 '시험 스킬' 을 위함일 뿐이라고 밝히지 않는가.

 학벌이 밥먹여주는 사회는 점점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이제는 배우는 일이 삶속에서 살아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한국 교육과 삶은 너무도 동 떨어진 각자의 개체일 뿐이다. 배워서 나와 남을 위해 베풀고 누리는 구조를 바라는 것은 큰 무리일까? 교육과 사회가 서로 선순환 하는 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인가.

누리고 나누는 삶을 위한 교육,
현실을 보면 한 없이 멀어보이지만 반드시 실현해 나가야 할 미래.


그 내일을 오늘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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